2006

우중산책 ::: 기형도 詩碑

maktub 2006. 6. 22. 17:19


사실 기형도 詩碑가 개막 되었다는 것보다도,
그것이 놀랍게도 회사 근처이기에,
게다가 비오는 우중산책 할 수 있기에 가보았다.
뭐땜시 저런 것을 해놓았을까 싶었는데,
기형도가 이 동네, 소하리에서 한 시절을 보냈다고 해서
광명시에서 했나보다 싶다.
막상 가보면 광명실내체육관 앞에 운동기구 있는 구석에 뎅그러니 비석이 있다.
시가 짧았다면 아마도 비석이 한 개였을 텐데,
조금 긴 <어느 푸른 저녁>이 있어서 두 개인 것 같다.
돌 위에 써있는 글자를 읽으니
무엇에 홀린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사실 이제야 기형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10년도 전에 그 시를 읽으면서 나는 정녕 기형도를 읽고 있었을까?
그땐 시집보다, 그의 산문을 더 좋아했던 것 같기도 하고......
다시 책을 읽어야겠다,
이 책이 아마 고향집에 있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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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푸른 저녁
-기형도-
1
그런 날이면 언제나
이상하기도 하지, 나는
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을 걷고
있는 것이다, 검고 마른 나무들
아래로 제각기 다른 얼굴들을 한
사람들은 무엇엔가 열중하며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혹은 좁은 낭하를 지나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가는
나는 그것을 예감이라 부른다,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숨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그런 때를 조심해야 한다, 진공 속에서 진자는
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씩 흔들리는
것은 무방하지 않은가
나는 그것을 본다
모랫더미 위에 몇몇 사내가 앉아 있다, 한 사내가
조심스럽게 얼굴을 쓰다듬어본다
공기는 푸른 유리병, 그러나
어둠이 내리면 곧 투명해질 것이다, 대기는
그 속에 둥글고 빈 통로를 얼마나 무수히 감추고 있는가!
누군가 천천히 속삭인다, 여보게
우리의 생활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
세상은 얼마나 많은 법칙들을 숨기고 있는가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느낌은 구체적으로
언제나 뒤늦게 온다, 아무리 빠른 예감이라도
이미 늦은 것이다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2
가장 짧은 침묵 속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결정들을 한꺼번에 내리는 것일까
나는 까닭 없이 고개를 갸우뚱해본다
둥글게 무릎을 기운 차가운 나무들, 혹은
곧 유리창을 쏟아버릴 것 같은 검은 건물들 사이를 지나
낮은 소리들을 주고받으며
사람들은 걸어오는 것이다
몇몇은 딱딱해 보이는 모자를 썼다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가는
나는 그것을 습관이라 부른다, 또다시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그러나
안심하라, 감각이여!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느 투명한 저녁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모든 신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