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소주에 대하여

2003 ~ 2006 2005. 1. 13. 10:27

외국에 있을 때, <한국> 사람을 만나게 된다. 교포라든가 3세라든가, 한국계라든가 어쩌구들.
그 어쩌구들에서 한국사람을 선별해서 각각에 맞게 대우를 해줘야 하는데,
그 기준이란 것은 의외로 간단해서 ::: 소주다.
소주 한 잔 하자는 말에 긍정적인 답변은 한국사람이다.
잘 못 마신다는 말과 함께, 술자리가 좋아요라는 말도 한국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위아래가 있고 형오빠 동생이 되지만,
이 두 가지에서 벗어나는 어쩌구들은 한국말을 조금 할 줄 아는 미국 사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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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는 일종의 환각제이자 안정제이다.
하루하루의 일상의 쌓인 찌꺼기들을 어둑어둑해진 골목어귀 선술집에서
한 두어잔씩 소주를 마시며, 그 알콜로 이런 도시생활의 언저리들을 소독해버린다.
신기하게도 사람들은 모두 소주를 마신다, 혹은 내게 그렇게 보인다.
밤이면 패를 이루어 술집으로 가고, 가지 못 한 일들은 패잔병처럼 집으로 간다, (내겐 그렇게 보인다)
소주는 도시에 밤을 지배하고,
마침내 도시는 소주병에 든 박제가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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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소주를 마신 것은 대학 입학전 지역 대학 동문회에서 였다.
할아버지 선배들이 따라주는 술을 마시다보니 몽롱~하니...
처음 지역소주를 마신 것은 농활에서 였다.
큰 고뽀에 따라잔 잔을 원샷하는데, 꽥! 그 맛이란,
하지만, 안주로 먹은 개구리 뒷다리 튀김은 닭보다 더 맛있다.
미국에서도 소주를 마셨다.
소주는 그 나라에서는 위스키 같은 술이라서 꽤나 비샀지만,
그래도 한국 사람인 나는 가끔 소주를 마셨다,
주거니 받거니.
베트남에서도 무슨 불로주라도 나누어 먹듯이 마셨고.

제대로 지역술을 마셨던 것은 제주도에 자전거 투어에서 였다.
혼자 자전거로 제주 해안도로를 돌다가,
첫날 밤 혼자 식당에서 해물뚝배기와 함께 한라산 소주를 다 마셨다.
그 깨끗함, 그 투명함, 그리고 알딸딸한 기분.
백사장에 들어가면 총을 쏜다기에 들어가지는 못 했지만 -.-;;;
알딸딸한 기분으로 파도 소리를 듣고 있으면,
사람들이 왜 바다가 빠져 죽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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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어디든 그 나라에 가면 맥주가 있고, 그 지역의 술은 따로 있다.
seattle에서 맛 본 redhook은 보리와 스타벅스 커피를 같이 넣어 만든 맥주다,
진하고 검은 맛이 일품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르어무이라는 45도짜리 술을 마시고 있었다.
르어무이를 얼마나 잘 마시냐가 그 사람의 수식어가 되곤 했다.

우리에겐 소주가 있다.
어둠이 깔리면 여기저기 아롱다롱 얼키설키 모여 앉아 주거니 받거니 소주를 마신다.
첨음 봐서 서먹한 사람도, 많이 봐서 익숙한 사람도,
기분 좋은 일이 있는 사람도, 기분 나쁜 일이 있는 사람도,
모두 다 소주를 마신다.
한 잔 한 잔 술이 들어가며, 보다 감성적인 동물이 되어,
말과 말이 아닌 마음과 마음으로 이야기를 한다.

* 주의 : 부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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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소주를 마시지만, 소주를 무슨 맛으로 먹는지는 모른다.
쓴 소주지만, 무엇이 좋다고 권하고, 무엇이 좋다고 들이대는지.
인생이 달콤할 땐 소주가 쓰지만, 반대로 인생이 쓴 맛을 보고 있을 때는 소주가 달다.
지금 처해 있는 인생에 대한 리트머스 종이라고나 할까.

***
지난 해 12월, 시베리아의 바람이 본격적으로 전국에 불어닥칠 때
지방을 다니게 되었고,
하루하루 다른 지방 소주를 맛보게 되었다.
같은 듯 하지만, 갈랐고, 다른 듯 하지만 같은 소주들.
이제부터 그 소주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련다.